[이성복 칼럼] 애경사 참여는 '품앗이'가 아니다
[이성복 칼럼] 애경사 참여는 '품앗이'가 아니다
  • 크리스천월드
  • 승인 2015.01.0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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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라고 예외 아닌 듯

▲이성복 장로

 

우리 조상들은 '품앗이'로 농사철이 시작되는 봄이나 가을, 일손이 부족할 때 노동력을 집중하여 지원해주는 식으로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전래되고 있다. 이 좋은 풍습이 노동으로 하는 품앗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여러 사람이 푼돈을 모아 결혼이나 장례 등으로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집에 목돈으로 대주는 이른바 '계'가 곳곳에서 성행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잔치나 장례에 있어서 이런 좋은 전통이 상부상조의 개념보다는 체면 유지나 이익에 반하여, 다시 말해서 나에게 이익이나 도움이 될만하면 참여하고, 그렇지 않으면 관심조차 없는 매우 타산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닌 듯 하다. 구약성경 전도서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다. 상(喪)을 당해 슬프고 어려움을 당한 집을 관심을 갖고 더 돌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교인 중에 상이 났을 때, 내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자녀들도 모두 결혼시켰으면 받은 것이나 갚고, 아니면 아예 참여를 안 한다든지, '내 집안 행사에 안 왔으니 나도 안 간다'는 식이다. 나와 상관이 없거나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무관심하거나 마음까지도 인색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애경사는 네가 왔으니 답례로 내가 가는 식의 '품앗이'가 아니다

'네가 안 왔더라도 내가 먼저 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성도간의 기본적인 자세요 교류다. 많은 기독교인이 품앗이로 착각하므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더 나아가 미워하기까지한다.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사회 구성원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한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의무가 있다. 그 의무는 기독교의 '아가페 사랑'과 희생이라는 기본바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고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만 속에서 울어 나오는 진정한 즉,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진가가 나올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하고 산다면 그 까짓 애경사 쯤이야 품앗이라고 굳이 잇속 따져가며 왕래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감사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하자

잠언서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했다. 사랑과 기쁜 마음으로 애경사에 참여하고 힘 닿는 대로 부조하면 꼭 그 사람한테서 되돌려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자녀요 권세자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짐 맡은 청지기'로 주께 하듯 하면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물질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까지 더불어 듬뿍 주실 것이다.

세상이 너무 야박해졌다고 크리스찬마저 짜진다면 이세상은 어쩌겠습니까? 내가 남보다 여유가 있다면 손해 좀 더 보고 조금 더 베풀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것만 지나치게 챙기고 주위를 안 돌보면 내편이 없게 되고 결국은 외톨이로 전락하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더불어 살아가야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성도들간에 어려울 때는 위로 받고 도움도 받고, 반대로 여유가 있을 때는 선심도 쓰고 도움도 주어 상생하며 살아야 한다. 백마디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반으로 감소한다고 한다.

애경사에 참여는 '품앗이'가 아니요 사랑이요 섬김이며 봉사다. 마태복음에 '오른손이 하는 것 원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대로 신앙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와 도움도 이와 같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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