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와 민족의 상고사"
"한국기독교와 민족의 상고사"
  • 크리스천월드
  • 승인 2017.03.2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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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문명 vs. 요하문명(홍산문명), 동이족은 요하문명의 창시자

  한국의 개신교가 교리나 이단, 신앙고백에만 관심을 갖다 보면 사회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한국의 개신교가 발전했던 것은 민족의 역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북간도 명동촌 건설, 3.1운동 , 33인 참여, 6.25, 보릿고개, 반독재투쟁 등 역사와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공적인 이익을 중시했기 때문에 민중들이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범 김구까지 개신교에 귀의하기도 하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도 개신교도 였다. 안창호, 조만식, 이상설, 윤동주, 이승훈 등 독립군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들이다. 개신교는 초창기부터 민중, 영적 각성, 희망, 사회복지라는 공적인 이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민중의 한 가운데 자리잡았다. 전국에 영락교회의 복지정책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기득권에 안주한 나머지 독재정권과 야합하고 민족의 사회와 역사성을 져버리다 보니 주변종교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지나친 반공, 극우파로 몰락하고, 자신들의 내부 기득권과 주도권을 갖기 위하여 소송이 줄을 잇고, 민족과 국가의 공적 관심보다 교리나 주도권, 명예, 극우적 이념 등 사익에 더 편승하다 보니 사회에서는 애물단지 종교로 되어 버렸다.

  민족의 역사를 져버린 개신교는 이 땅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어 점점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사회에서 보는 개신교에 대한 입장은 애물단지 종교이다. 민족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져버렸기 때문이다. 공룡이 된 개신교는 사회적 환경변화에 적절하게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한국개신교가 이제는 민족의 뿌리찾기와 고대 문명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적인 관심에서 공적인 관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수메르 문명

수메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노아가 살았던 이라크 지역에서 대략 기원전 4000년경부터 2000년까지 살았다.

 

수메르인들은 법전을 만들었고, 바벨탑까지 쌓아올릴 정도로 건축술이 뛰어나기도 했다.

 

이 바벨탑의 후예가 지구라트이다. 수메르 사람들이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중의 하나는 문자의 발명과 도시건설을 들 수 있다. 문자가 없었다면 법문서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건축술이 없었다면 바벨탑이라든 지구라트가 만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루크(Uruk)에서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기호로 뜻을 나타낸 상형문자였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되고 개량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이른 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을 굵은 갈대펜(stylus)으로 긁어서 문자를 기록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사를 선사(先史)시대와 역사(歷史)시대로 구분짓게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본다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을 가져다 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도시의 발명은 인간들이 모여서 집결된 주거지를 건설하고 조직이라는 것을 만들어 서로간의 삶을 규율하게 했고, 오늘날까지 인간 삶의 기본 패턴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의의를 지닌 도시 건설이 기원전 3천년대의 후반기에 역시 수메르 사람들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함무라비왕이 있었던 아카드에 의해 멸당하고 사라진 민족이다.

이러한 문자문명과 도시문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교육제도와 정치제도까지 발전시켰다. 러시아 태생의 저명한 미국인 수메르학자 사무엘 크레이머에 의하면 수메르인들에게는 인류 최초의 학교, 최초의 민주적 대의제도 등 인류의 문명사, 문화사에서 최초의 중요한 것 27가지가 수메르인들의 발명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메르의 점토판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점토판에 문자를 쓴 것이 기록된다.

당시 기원전 2000년경에 수메르는 정치적 의회가 열리기도 했다. 현대의 의원제와 유사하게도 그 당시부터 양원제가 구성되었다. 이러한 의회제는 그리스의 민주제나 로마의 공화제보다 훨씬 앞서 있다. 수메르 점토판에 의하면 의학서, 농학서, 판례, 윤리, 도덕, 문학서까지 나타난다. 그야말로 인류최초이지만 상당히 발전된 문명을 갖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함무라비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함무라비법은 히브리법전을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동해보복법, 시죄법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함무라비법에서 발견되는 것이 히브리법에서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발견되기 힘든 오늘날 성문법전이 기원전 2000년경에 탄생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수메르문명은 아카드, 바빌로니아, 앗시리아까지 이어지고, 이스라엘도 영향을 받지만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의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발전해 나갔다.

홍산문명과 동이족

이당시 한반도는 청동기문명과 한자문명을 가진 고조선이 지배하고 있었다. 고조선사람들은 일명 동이족으로서 요하문명을 잉태한 사람들이었다.

 

서울대학교 신용하 교수는 요하문명의 동이족들 중에 예족, 맥족이 있었다고 하고, 이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한강유역에 있었던 한족들과 함께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마전 산동반도에서 출토된 골각문자는 상나라에서 출토된 갑골문자보다 1,000년이상 앞섰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BC 1600~1046)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보도했다.

 

이러한 동이족들은 골각문자이외 지금의 내몽고 자치지역인 홍산에서 옥으로 만든 문명을 잉태시키기도 했다. 홍산문명에서 출토된 옥기는 한반도에서도 발견이 된다. 특히 빗살무늬 토기, 비파형 동검, 적석총, 제단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의 우하량에서는 무려 기원전 3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적석총[], 여신묘[], 대형 원형제단[]을 모두 갖춘 동북아 최고最古 문명이 발굴되자 세상은 깜짝 놀랐다.

 

이 문명은 인류의 4대 문명이라 불리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 문명보다 1~2천 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으로서, 이미 5,500년 전에 종교를 중심으로 제정일치의 국가조직을 갖춘 상고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사와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홍산문명은 동이족이 이루어 놓은 문명이다. 동이족 중에 예.맥족이 한반도로 내려와 오늘날의 고조선을 세웠다. 특히 청동기문명을 갖고 있는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죽, 영지, 산융, 동호등 다양한 종족 집단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동이족이라고 볼 수 있다. 요서지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청동기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 대릉하유역의 비파형동검은 한반도에서 발견된다.

 

신용하교수는 동이족인 예족은 호랑이 토템, 맥족은 곰토템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고조선으로 건너왔고, 후기에 고려의 중일연은 삼국신화를 쓰면서 곰토템을 만든 것이다. 졸지에 한민족은 곰의 자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1915년 일본인 고고학자 도이류가 요하문명을 발굴한 이래 유적을 토대로 조선상고사는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신채효선생은 조선상고사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조선상고사는 독립운동으로 10년 실형을 받고 뤼순감옥에서 투옥 중이었던 신채호가 1931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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