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창 칼럼] 자기 목숨을 잃으라
[김윤창 칼럼] 자기 목숨을 잃으라
  • 크리스천월드
  • 승인 2016.12.30 15: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그리스도인이 자기 목숨을 잃지 않는다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럼에도 자기 목숨을 잃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목숨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많다.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믿음이지만 그런 그리스도인을 보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은 자기 목숨을 잃기도 전에 이미 믿음을 이루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엄중한 경고는 자기 목숨을 잃지 않는다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믿음에는 자기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사람만이 위로부터 오는 새 생명을 입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만일 자기 목숨을 잃지 않고도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정하는 자로서 믿음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의 말이나 주장은 거짓에 해당하여 들어 볼 가치도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읽고 듣고 살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목숨을 잃고 생명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이다. 또한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며,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아야 자기 사랑을 버리고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자기 목숨을 위해 형통과 부요를 원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같은 행위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중심적인 믿음은 오히려 참 믿음보다 훨씬 더 열심과 노력을 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잃어야 하는 믿음과 상관없이 자기 사랑이나 영광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복음의 핵심은 자기 목숨을 잃고 생명을 얻는 데에 있다. 본문은 마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잃더라도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로 보여질 수 있다. 그것은 오해다. 그리스도를 위한다면 자기 생명을 잃으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죄인으로 타고난 목숨을 잃으라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충성을 다하지만 그 열매는 환영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쓴 열매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잃어야 할 자기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 그리스도를 위한다면 우선 자기 목숨을 잃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그럼에도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은 멀기만 하다. 아니 어쩌면 참 믿음은 좁은 문과 같아서 드러나지 않는 소수만이 참 믿음의 길로 행하고, 그 외 대다수는 넓은 문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시대 시대마다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 목숨을 잃지 않고 믿는 자들 때문이다. 심지어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던 때부터 거짓 형제들이 있었고, 바울은 믿음에서 벗어나 율법을 받아들이려 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며 다시 해산하는 수고의 필요성을 강조했었다. 하물며 사도들이 없는 시대에는 어떠하겠는가? 단지 성경과 그리스도, 교회를 사랑하는 것으로 참 믿음으로 인정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아직 종교개혁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인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에 대해서 배우고 연구하여 그것을 주장하며 가르친다고 해서, 바른 교회나 참된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가 종교개혁 사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가르치는 성경을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자기 목숨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 그리스도를 외쳐도 자기 목숨을 잃지 않는다면, 타락한 교회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거짓이었을까? 아니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도 정상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그처럼 충성을 맹세할 때는 아직 자기 목숨이 위협을 받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가 잡혀 있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목숨이 위협받을 때, 그는 세 번이나 그리스도를 부인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지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며, 아직 자기 목숨을 잃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그는 자기 목숨이 버려지는 은혜를 입고 구원을 입게 되었다. 오늘날의 교회가 믿음에 서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는가? 교회마다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적어도 교회가 평안할 때에 그렇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잃지 않은 자들의 교회는 조그마한 일에도 태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종교개혁 사상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사상이 가르치는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잃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보라. 그러면 단지 종교개혁 사상을 배워서 행했던 일이 사실상 아무 것도 모르고 행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믿음은 지식이 아닌 실제이다. 오직 그리스도가 맺게 하시는 아름다운 열매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목숨을 잃어본 적이 없는 거짓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실제가 없는 지식에 근거한 믿음은 아무리 바르다 해도 작은 바람만 불어도 비명을 지를 것이다.    

 

오늘날 개혁주의를 보라.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은 개혁주의가 맞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니다. 인위적인 교육으로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로 행하지 않는 일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이나 오직 은혜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들의 삶은 타인을 향한 판단으로 피곤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바른 믿음에 서있는지는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잃어보라. 그런 후에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보라. 그러면 그토록 주장했던 개혁주의가 육신에 속한 지식주의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은 스스로 가능한가? 아니다. 만일 스스로 목숨을 잃으려 한다면 그는 아직 '오직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행하도록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또한 그토록 '오직 성경'을 주장한다면,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스스로 의롭게 행하려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만을 따라 보라. 그러면 스스로 자기 목숨을 잃을 수 없는 당신이 그의 은혜로 자기 목숨을 잃고,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의 생명을 입게 될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자기 목숨을 잃은 자에게 은혜로 주어진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되는 일이다. 그가 행하시도록 자신을 그에게 드려라. 그러면 당신 안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