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현 목사] 5월 그날
[김고현 목사] 5월 그날
  • 채수빈
  • 승인 2020.05.2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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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현 목사

5월은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족관련 기념일이 들어 있어서 '가정의 달' 이라고 한다. 하지만 5월에는 잊을 수 없는 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오늘(18일)이 40주년 기념일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97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에 따라 매년 5월18일을 국가 법정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매년 5. 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5. 18 광주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5.16군사정변으로 군부에서 정권을 잡은 제3공회국 박정희대통령이 1979년10월26일에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을 맞아 사망하면서,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1979년 12월12일 군사쿠데타로 다시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찬탈(簒奪)하자 1980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키워오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면서 1980년 5월 초에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집회와 시위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광주 역시 도심에서는 시민들과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가 개최되고 다양한 형태의 민주화 활동이 전개되었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던 광주에는 계엄군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5월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한 학생들은 주둔하던 계엄군과 충돌한다. 계엄군은 무고한 학생 시위대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압봉을 휘둘러 무차별 구타, 무차별 연행을 자행했다.

그것은 전두환과 신군부가 계획적으로 진행한 진압작전이었다. 이들은 정치인 김대중을 '국가내란 선동죄'로 구속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이 김대중의 배후조종과 북한의 지시에 의해 계획적인 무장봉기라고 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후의 조사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이 주장은 전두환과 신군부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계획된 연출이었다. 제31사단 군인이 투입되면서 언론 통제가 시작됐다.

또한 계엄군과 더불어 추가로 파병된 공수여단까지 비폭력 시위를 하던 시민과 학생들에게 폭력 진압을 일삼았고, 이에 시민과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맞서기 시작하면서 광주 도심은 전쟁터로 변해갔다. 보안사의 언론 통제로 광주의 민주화운동이 '북한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되면서 광주는 순식간에 외부와 고립된 상태로 외로운 민주화운동을 이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무차별 발포 및 조준 사격을 가하면서 수 많은 무고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광주시내 120여개의 병원, 보건소, 종합병원 등에는 수용이 불가능한 정도로 많은 사상자들이 넘쳐다. 광주은 무장된 군인들로 완전히 포위되어 봉쇄됐다.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재가할 것을 요구했고,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무고한 광주시민들 살육은 계속되었다. 전두환은 5월 27일 계엄군이 광주시로 탱크를 앞세워 시내로 진입하여 금남로에서 도청 안에 있는 시민군에게 조준 사격을 가하는 계엄군 특공대는 무자비한 진압을 일삼으며 결국 전남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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