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안동교회” 공개토론 열려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안동교회” 공개토론 열려
  • 채수빈
  • 승인 2019.12.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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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교회 부자세습반대 성명서 및 100만성도 서명운동개시 선언
△지난8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역사연구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안동교회에서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안동교회”를 주제로 공개토론을 개최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역사연구위원회는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안동교회(당회장 황영태 목사)에서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안동교회”라고 하는 주제로 3.1운동 100주년과 안동교회 설립 110주년 기념 공개 강연 및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강연회는 안동교회 원로목사인 유경재 목사와 원로 사학자 이만열 교수, 이명하 선열의 손자인 이흥종 원로 목사 등 학계 교계 유명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행사를 기획한 안동교회 역사연구위원회 위원장 방승주 교수(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헌법학)는 “이 강연회를 통하여 민주공화국 100년의 역사와 기독교 그리고 안동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험난한 시대를 살아 나가는 우리 후손들과 미래 세대가 과연 어떠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토론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찾기 위해서 기획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제1부 기조강연에 나선 이덕주 교수는 “3.1운동과 기독교 영성 – 기독교 민족대표들의 종교 권위와 사회 지도력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을 통해서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은 3.1운동 기독교 민족대표들이 가졌던 윤리와 도덕성,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살신성인의 영적 리더쉽이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임을 강조했다.

이어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와 「12인 등의 장서」 사건”의 제목으로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의 강연이 이어졌다. 김백원 목사는 안동교회 제2대 목사로서 3.1운동 민족대표들이 모두 체포되어 투옥되고, 3.1운동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다시 이 독립운동의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김백원 목사와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 등이 주도한 「12인 등의 장서」 사건이며, 이는 인천에서 이루어진 한성정부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고 그는 강조하였다.

제2부는 안동교회 교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몽학 이명하 선열의 손자인 이효종 장로가 이명하 선열의 일대기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였고, 곧이어 기전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당시 결사대를 조직하여 3.1운동을 이끈 김은조 권사의 3.1운동에 대하여 그녀의 五男인 이본 장로가 소개했다. 그리고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그의 장남인 윤상구 장로가 발표하였다. 해위 윤보선은 1914년 일본유학에서 귀국한 후 기회를 찾다가 1918년 여운형을 쫓아 상해로 떠났기에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상해로 건너가 예관 신규식 선생이 창간한 독립운동의 주보였던 ‘진단’의 발간을 창간호로부터 6개월간 도맡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경험을 기초로 제1공화국 초기 ‘민중일보’사장을 맡기도 하였다고 설명했다.

제3부 지정토론자로 나선 김승일 동아시아미래연구원장은 「몽학 이명하 선열」 2006의 저자인데, 이 책 저술 당시의 경험과 이후 이명하 의사 연구가 의병사 연구에 미친 영향 및 성과를 중심으로 토론에 나섰다. 그는 이명하 의사의 의병투쟁사 연구를 통해서 그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자료가 적어 어려웠지만, 그와 관계된 여러 사료 및 동료들의 행적들을 통해 어느 정도 그의 일생을 재조명할 수 있는 근거를 수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병사 연구에 있어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자평하였다.

역시 지정토론자로 나선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은 세계 독립운동사에서 정부를 수립하여 독립투쟁을 한 사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이 기념관에는 김구, 윤봉길, 안창호 등 유명한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고 실패한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해서 2,000명의 각계 각층의 독립영웅들을 모시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해위 선생은 집안이 비교적 유복하여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영국으로 가는 길, 중도에 상해를 찾아 유학을 일시 포기하였으며, 그리고 혁명의 길에 들어섰고, 신규식의 다락방에서 1921년까지 4년을 머물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익히고 실천하였다고 역설했다.

한편 행사 후 안동교회 당회원을 비롯한 성도들은 명성교회세습을 사실상 용인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4회 총회 의결은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들은 무너진 총회 헌법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각 노회는 비상대책기구를 설립하여 헌법질서를 정상화한 후, 책임자들에 대하여 권징절차에 돌입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동시에 교회세습을 반대하는 100만 성도 서명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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