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찾은 선교사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한국을 찾은 선교사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 크리스천월드
  • 승인 2016.02.0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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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최초의 실천신학교수 곽안련(Charles Allen Clark)의 『목사지법』에 나타난 예배의 신학과 이론
 
 
 곽안련은 한국교회를 위하여 태어났고 한국교회를 위하여 전 생애를 다 바친 사람이다. 그가 76세가 되던 때 한국에서 청춘을 바쳐 선교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공사장에서 그리고 출판계에서 얻은 고국에서의 내경험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거의 비등하였고, 그것은 나의 선교현장에서 가장 값진 보람을 안겨주었다."고 실토하리만큼 그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어느 누구보다 다양하게 선교에 열정을 쏟았던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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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안련은 1878년 5월 14일 목수였던 아버지(William Oliver Clark)와 청교도의 후예였던 어머니(Lillian Carolin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네소타(Minnesota)주에 있는 스프링 밸리(Spring Valley)라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났으나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열 살이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익사사고로 형을 잃은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곽안련은 주어진 삶의 장에서 10대를 후회 없이 보내고 있었다.
 
 그가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2년을 마치자 그의 인품과 활동을 눈여겨 보아온 노회는 그에게 맥칼러스터(Macalester) 대학에서 남은 2년의 수학을 하고 신학교를 갈 것을 권하였다. 그는 이 대학에서 공부 하는 동안 목사보다는 라틴어와 헬라어교수가 되기를 희망했었다. 그 이유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수줍음을 타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고, 둘째는, 목사가 되면 혹시나 미개한 나라의 선교사로 나가게 되는 결과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가 졸업한 대학은 장로교 계열로 나일 목사(Rev. Edward Duffield Neill)가 1874년에 세워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교육을 시켰기에 졸업생들이 신학교에 진학을 많이 한바 있다. 이 대학에서는 그가 졸업한지 12년 후인 1911년에 명예신학박사를 선교에 혼신을 다하고 있던 곽안련에게 수여하기도 하였다.
 
 곽안련은 대학을 졸업하고 매고믹(MeCormick) 신학교를 입학하였으나 목사가 된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졸업하기 4 개월 전이였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 있다.
 
나는 목사가 되는 문제에 대하여 10년 동안이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드리지 않고 격론을 벌리다가 신학교 졸업 4 개월 전에야 드디어 항복을 하고 말았다… 나는 주님의 뜻에 날 맡기고 난 다음에 온종일 기쁨 속에 찬송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해외선교사로 가는 것만은 원치 않았다.
 
 그에게는 해외선교사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유로서 형을 잃고 장남의 위치에 있는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은 외아들까지 보내셨다는 메시지를 듣고 자신은 동생이 있는데도 주님이 원하시는 데로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주변에서 때마침 애송하던 노래 "오 사랑의 주님! 산골짝이나 평원이나 바다라도 주님이 원하신 데로 나는 가오리다."를 많이 불렀으나 자신은 그 노래를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그는 목사가 되더라도 해외 선교사만은 피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단 선교부가 보내온 신청서의 항목을 기재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 한국을 다녀온 친구가 한국에 대한 말을 많이 했기에 먼저 한국을 그리고 중국, 일본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원하는 곳이 아니라도 어디든지 가겠다는 항목에 깊은 고민 끝에 서명을 했기에 한국행은 불확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곽안련을 한국이 필요한 선교사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 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의 동기들 44 명 중에 18명이 선교사 지망을 했다. 그 당시의 한국은 미개한 나라였고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아는 사람들이 아주 적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망생들이 한국을 지원했었는데 한방에 살던 내 친구 컨스(Kerns)와 나만이 지원한데로 한국에 가게 되었다.
 
B. 한국교회를 섬긴 목사
 1902년 9 월 22일 한국의 땅 제물포에 도착한 인간 곽안련에게는 거대한 시련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 발을 내려딛을 때 당시에 가장 무서웠던 전염병 골레라가 온 나라를 휩쓸어 수만의 생명을 앗아갔고, 이어서 천연두가 엄습하여 어린이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계속하여 어린이들이 피해를 가장 많이 주는 전염병 성홍열(猩紅熱)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바로 이 전염병에 곽안련은 사랑하는 두 아들이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부모로서의 가장 슬프고 아픈 사연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한반도에 상륙하여 맞은 첫 시련치고는 실로 감당할 수 없는 비통한 슬픔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두 아들을 선교의 땅에 묻고 일어선 곽안련은 교회를 위한 대담한 행진을 계속하였다.
 
 곽안련이 1922년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그는 교회를 세우고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하는 목사의 길을 20년 동안 걸었다. 그가 1906년 승동교회의 담임을 하였으나 그의 목회 무대는 실로 넓었다. 그가 품고 있었던 끊임없는 전도의 열기는 150여개의 교회들을 개척하기에 이르렀으며, 자신이 당회장으로 성례를 집례해야 했던 교회가 매년 20여 교회였다. 어떤 해는 150여 교회를 책임을 지고 순회를 하였고 그런 때는 그의 절대적인 교통수단이었던 말 위에서 거의 시간을 다 보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순회하였던 지역은 서울을 비롯하여 멀리는 동해안이었다. 그가 이 넓은 지역을 동분서주 애를 쓰면서 오직 교회를 섬기고 믿지 않은 영혼들을 전도하면서 때로는 위험한 고비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나의 순회는 주로 장마철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시골에는 물이 범람하였고 중국벌래(China’s teeming millions)가 온 누리에 가득했었다. 농부들은 들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와야 했었고 학습과 세례문답을 한 후에 성례를 해야 했기에 우리의 예배는 보통 밤 11시에 시작되었다. 교각은홍수로 망가졌기에 나는 물이 불어난 위험한 개천을 건내야 했다.3) 어느 때는 물 깊이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물길을 해쳐 가다가 건너편 사람들이 바로 앞의 물이 12자가 넘는다고 소리 질러 위험의 순간을면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토록 어려운 여건의 목회의 길에서 언제나 보람을 느끼면서 동분서주 애를 쓰면서 목회의 현장에 우뚝 선 목사의 사명을 감수하였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 선교사로 있던 동안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를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으나 약 3천명은 넘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76세의 생일을 맞이하면서 쓴 회고록에서 그는 한국에서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는 5일 만에 한번씩 서는 장터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일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때 그의 전도방법은 3 단계의 전략을 가지고 매우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먼저, 자신이 등장하여 이색인종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자신이 한국인이 알고 있는 노래의 주제를 화제로 삼아 몇 마디 한다. 어김없이 몰려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되면 자신은 물러나고 자신의 전도팀에 있는 한국인이 등장하여 전도를 하게 한다. 마지막 단계는 자신들의 전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을 발견한다. 그때 곽안련은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그가 사는 동네를 방문하게 된다. 그 방문은 바로 개척교회로 이어졌다.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한국의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보이는 그의 선교의 의지를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곽안련은 교회만을 섬기고 순회하는 목회에만 머문 목사는 아니었다. 그는 1905년부터 승동교회 안에 면려회(Christian Endeavor Society)를 조직하여 청소년 사역에 정성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적으로 음주와 흡연의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자 조만식과 채필근이 중심이 된 의 자문위원으로 참여를 하면서 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사회의 정화를 위한 목회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나타내기도 하였다.
 
C. 실천신학을 이 땅에 심은 교수
 곽안련은 학문의 존재 가치를 탁상의 이론만으로 머문 것을 원치 않고 현장의 실천에서 그 가치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학자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의 선교부는 그를 신학교 교수의 일을 맡길 의향이 있었으나 그는 목회의 장에서 먼저 선교의 발길을 다지기로 결심하고 교회를 섬기는 현장을 찾았었다. 그는 갖은 불편을 다 겪으면서 배운 바를 목회의 장에서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학자적 자질을 아는 평양신학교에서는 한교수가 선교지를 떠나야 했기에 승동교회에서 담임을 하고 있는 그에게 출강을 요청하고 1908년 5월에 평양신학교에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때 그의 손에는 그의 스승 존슨(Herick Johnson)의 '설교학 강의안'이 번역이 끝나고 출판을 서둘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교수진들은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그를 반기었다. 그의 말대로 아무도 당시의 평양신학교에는 설교학 분야의 강의를 할 수 있는 교수는 없었다. 그가 설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던 때는 1907년 대각성부흥운동의 파도가 전국을 한창 휩쓸던 시기였다. 이때 말씀의 바른 선포와 해석과 적용을 위한 교육은 어느 과목보다 절실한 때였다. 바로 그 때 그가 설교학 책을 들고 평양신학교에 입성하였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에 깊은 뜻을 두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봄이 타당하다.
 
 그가 강의를 시작했던 평양신학교의 교과과정에는 설교학이라는 과목 자체가 없이 다음과 같이 짜여져 있었다.
 
– 신학일반 및 소요리문답: 마포삼열(Samuel A. Moffet)
– 구원론: 배위량(William M. Baird)
– 유대사기: 소안론(William L. Swallen)
– 목회학: 이길함(Graham Lee)
– 마태복음 및 고대사: 헌트(William B. Hunt)
– 모세오경: 배위량, 소안론
– 산수: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
 
 그 때부터 그는 서울의 목회의 장과 평양의 선지동산을 오르내리면서 새로운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곧 이어 목회학과 교회법을 추가하여 강의하게 되었다. 그가 1916년 평양신학교의 전임교수가 되어 실천신학 학과장이 되자 그는 1922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실천신학의 기틀을 잡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설교학, 설교실제, 예배모범, 목회학, 목회실천, 교회정치와 권징, 교육학, 청년사역, 사회봉사, 개인전도, 기독교 심리학, 아동 심리학, 주일학교 조직 등의 과목을 만들면서 실천신학의 분야를 점차 넓혀 나가게 되었다. 이 때부터 평양신 학교는 실천신학이 교육의 전체흐름을 주도하는 느낌을 풍기면서 한국 교회의 신학과 목회의 요람지로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그가 한국의 땅에서 한국선지생도들에게 교육을 시킴에 있어서 그는 다른 교수와는 그 교육정신이 달랐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의 회고록에 담긴 다음의 한 구절은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말이다. 교수들은 초창기에 영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가치를 인정하고 개별적으로 원하는 학생들에게 정규 과목과 별도로 교육을 시켰다.
 
 여기서 곽안련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혜안이 남달랐다는 사실과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투철한 교육 이념이 그의 가슴에 있었기에 1908년부터 발을 들여놓은 실천신학교수의 사명은 1939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강제로 폐교되기까지 교수의 직을 고수하면서 1,600명에 이르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실천신학을 심어주었다.
 
 곽안련에게는 이상과 같은 많은 강의와 주말마다 쉬지 않고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례를 행하여야 하는 막중한 사역을 감수하였지만 그에게는 어느 선교사도 따라올 수 없었던 또 하나의 탁월한 기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저술 활동이었다. 그는 “나는 51권을 책을 펴냈다”고 말하면서 이 부분에 대한 자랑스러운 회고를 하고 있다. 그가 밝힌 바에 의하면 42권은 한국교회를 위하여 펴냈는데 그 20여권은『설교학』을 비롯한 실천신학 교제였고, 그 외는 주석서를 비롯한 성경연구에 필요한책들이었다. 영어로는 7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는『한국에서 맺은 첫 열매들』(First Fruits in Korea)과『한국의 전통 종교들』(Religions of Old Krorea)을 비롯하여, 선교정책에 소중한 지침서로 널리 알려진『한국선교사역에 네비우스 정책』(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 in Korea)등을 2 권의 스페인어로 된 저서를 남겼다. 이토록 많은 책을 펴낸 것이 그의 저술 활동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1918년부터 발간하였던『신학지남』에는 언제나 곽안련 교수가 주요 기고자였다. 그는 이 간행물을 통하여 일선 목회자들에게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제공하기에 바빴음을 “나는 신학교교육을 보완하기 위하여 22년 동안 신학지남을 발간하였고 최소한 그 원고의 6분의 1은 내가 집필하였다.”11)는 말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곽안련은 분명코 한국교회에 설교학을 중심한 실천신학의 씨앗을 유감없이 뿌렸다. 그리고 그 씨앗은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룩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밀알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장신논단 제22집, 2004.12, 217-24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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