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 ‘죽음보다 강한 사랑’ 실천으로 예수를 전하다.
손양원 목사, ‘죽음보다 강한 사랑’ 실천으로 예수를 전하다.
  • 채수빈
  • 승인 2017.12.2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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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의 다큐멘터리 ‘죽음보다 강한 사랑’(2013년 작)을 KBS 1TV가 지난 25일 성탄특집으로 오전 6시 재방송했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친아들을 죽인 자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여 자신의 양아들로 삼은 목회자다.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고 1939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지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 수용시설로 손 목사는 환자들에게 전도와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을 했다.

방송에선 음성 한센병 환자촌인 여수 애양원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독한 이들인 음성나환자들의 상처에서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면서까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 내용이 방영돼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전달했다.

특히 1948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자신의 두 아들 동신·동인을 죽인 학생을 위해 구명운동을 벌이고 마침내는 양아들로 삼았던 감동적인 내용을 담았다.

일제치하인 1940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되어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모두들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던 인물이다.

당시 KBS1TV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한국교회사에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인간 손양원은, 그가 한센병 환자들에게 보여준 이웃 사랑과,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고문을 이겨내며 실천한 나라사랑, 그리고 두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 청년까지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아가페 사랑의 실천으로, 일찍이 한국 근현대사 인물 가운데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편, 기록에 의하면 손양원 목사는 이 중동학교에서 낮에는 학업에 열중하고 밤에는 만두를 팔면서 고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운동으로 징역을 살게 돼 손 목사는 심적인 고통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게 됐고, 결국 손양원 목사는 중동학교에서 키워가던 꿈을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손 목사의 최종 학력은 중동학교 입학(1919년 4월)과 자퇴(1920년 4월 3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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